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앙카라 전투 (문단 편집) == 영향 == 앙카라 전투 이후 티무르의 군대는 아나톨리아 전역을 휩쓸었다. 오스만 술탄국의 수도였던 [[부르사]]는 힘없이 문을 열었으며, 그외의 여러 요새들도 마찬가지였다. 오스만 술탄국은 아나톨리아 남부 대부분을 상실하였으며 그 자리에는 카라만, 잔다르[* 잔다르 토후국은 아나톨리아 북부에 재건되었다.], 아이딘, 멘테셰, 게르미얀, 사루한, 테케 등의 오스만 술탄국이 정복했던 튀르크계 [[아나톨리아 베이국]]들이 대거 재건 되었다. 그렇게 오스만을 대위기로 몰아놓고 티무르가 동쪽으로 돌아갈 무렵, 바예지트의 자식들은 후계자 다툼에 돌입했다.[* 바예지트는 5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셋째 무스타파는 티무르에게 포로로 잡혔고 장남 쉴레이만은 루멜리아의 [[에디르네]], 차남 이사는 아나톨리아 서부의 [[부르사]], 사남 [[메흐메트 1세|메흐메트]]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아마시아]]에 근거지를 두었다. 삼남 무스타파는 티무르에 포로로 잡혀 계속 억류되어 있었고 막내 무사는 이사가 할거하기 이전 부르사를 근거지로 두고 있었다가 이사에게 자리를 뻇겨 게르미얀 공국으로 망명했다.] 이후 10여년간 오스만 술탄국은 네 명의 형제들이 하나뿐인 술탄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공위시대]]에 돌입한다.[*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티무르는 바예지트의 넷째 아들인 메흐메트를 술탄으로 임명했다. 그리고 내전 중에 네 형제는 제각기 주화를 발행했는데, 그 가운데 '술탄'이 발행했다는 것이 명시된 주화는 메흐메트의 것뿐이다. 이를 근거로 일부 학자들은 메흐메트의 치세를 공위기가 끝난 1413년부터가 아니라 앙카라 전투 직후부터로 보아야 한다고도 한다.] 바예지트 1세는 자신의 군대가 파괴되고 포로로 잡힌 것도 모자라 부르사에서 끌려온 자신의 처자식들까지 확인하고는 실의에 빠졌다. 티무르는 바예지트 1세에게 꽤 잘 대해줬다고는 하나 워낙에 기록이 엇갈려 알기 어렵다.[* 유럽 측과 오스만 측 사료에는 티무르가 말을 탈 때 발받침으로 사용했다는 식의 기록까지 보이고, 후대했다는 것은 티무르 제국 측 역사가들의 기록에 보인다. 양측 역사가들의 입장 차이를 고려해보면, 그냥저냥 대했거나 아주 학대하거나 후대하지는 않았던 듯.] 바예지트 1세는 이듬해 8월 감옥에서 사망하는데, 병사라는 말도 있고 자결이라고도 전한다. 유럽 각국은 처음에 이 소식을 듣고는 환호에 휩싸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장사를 하고 있던 [[제노바 공화국|제노바]] 상인들의 경우 성벽에 몽골의 깃발을 내거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전투 직후 티무르군에 의해 아나톨리아 전역이 초토화되는 것을 보고는 두려움에 떨었다.[* 유럽 역시 티무르에게 공격을 당한 적이 없는건 아닌데 티무르가 아나톨리아를 휩쓸고 다닐 때 [[성 요한 기사단]]이 점거중이던 [[스미르나]]가 도매금으로 묶여 같이 갈려버렸다.] 역설적이게도 티무르군의 만행에 의해 유럽과 오스만 술탄국은 잠시나마 화해의 분위기가 감돌았고 "똑같이 무서운 놈들이라도 아는 놈이 모르는 놈보다 그나마 낫다"는 생각에 이탈리아 선박들이 발칸 반도로 도망치려는 오스만 패잔병들을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발칸 반도로 피난시키는 일도 빈번하게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에게 복속되었던 유럽 봉신들이 반기를 안 든 건 아니어서, [[세르비아 공국]] 및 [[왈라키아 공국]], [[동로마 제국]] 등은 오스만 술탄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후계자 다툼을 벌이는 [[바예지트 1세]]의 자식들 사이에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줄타기와 눈치싸움에 돌입한다. 이후 바예지트의 넷째 아들로서 다른 형제들을 모두 제거한 [[메흐메트 1세]]가 내전의 후유증을 어느 정도 치유하고 세상을 떠났고, 그 아들로 뒤를 이은 [[무라트 2세]]가 내전의 뒷수습을 마친 뒤 다시 한 번 확장에 나서게 된다. 그리고 다시 뒤를 이은 [[메흐메트 2세]] 때인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여 제국의 기틀을 다졌는데, 이 때는 앙카라 전투로부터 51년이 흐른 시점이었다. 티무르는 한번의 전투로 승부를 마무리짓고 막대한 [[전리품]]을 챙겼다. 그러나 티무르답게 이 지역을 온전히 자신의 영역으로 흡수하려는 행보는 전혀 보이지 않고 막대한 약탈품을 챙겨 사마르칸트로 귀환한다. 만약 티무르가 이때 오스만 술탄국을 정복하고자 했다면, 아마도 최소한 아나톨리아 반도는 장악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티무르는 이러한 일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스만에 의해 멸망당한 튀르크계 공국들을 재건시키는 선에서 일을 끝내고 사마르칸트로 돌아가 다음 원정 준비를 시작했다. 이후 3년 뒤 티무르는 [[명나라]]를 공격하기 직전에 사망한다. 이후 앙카라 전투에서 각 부대의 지휘를 맡았던 티무르의 자식들과 손자들 간의 내분으로 티무르 제국은 혼란에 빠지게 된다. 이는 아들들에게 재산을 골고루 나누어주는 몽골인의 관습 때문이었다. [[칭기즈 칸]]이 아들들에게 영토를 나누어주었듯이 티무르도 그랬던 것인데, 티무르는 아들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챙겨주었다. 그런데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하라' 라고 명확하게 정하고 죽은 칭기즈 칸과는 달리, 티무르는 후계자 문제를 명확히 정해놓지 못하고 죽었다. 그러니 서로 내가 정통이네 아니네 하며 내전을 일으킨 것이 당연했다. 샤 루흐가 티무르 사후 혼란을 수습했지만 샤 루흐 사후 티무르 제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 붕괴해버리고 만다. [[분류:오스만 제국의 역사]][[분류:1402년 전투]][[분류:티무르 제국]][[분류:앙카라]]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